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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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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응급의료종사자 대상 수기 공모전 수상작 [괜찮다는 말의 온도]
구분 : 공통 등록일 : 2026-01-12 조회수 : 157

2025 응급의료종사자 대상 수기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수상작을 공개합니다!

응급의료 현장에서의

기억에 남는 한마디가 담긴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괜찮다는 말의 온도 (청초)

응급실에 있다 보면 사람의 목소리가 먼저 들어온다. 울먹임, 떨림, 조급함, 그리고 간절함.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그 소리들을 그냥 상황의 일부로만 받아들였다. 의료진이라면 흔히 마주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독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다. 내가 환자를 보는 게 아니라 환자를 둘러싼 절박한 마음을 함께 견디고 있다는 걸 깨달은 시점이 말이다. 그날도 정신없이 바쁜 저녁이었다. 구급대가 들이닥치고 모니터 소리가 엇갈리고 보호자들의 발걸음이 복도에 긴박하게 울려 퍼졌다. 교통사고 환자 한 분이 들어왔고 그 곁에 딸로 보이는 분이 있었다. 얼굴이 새하얬다. 눈빛이 흔들렸다.

“아버지, 괜찮으신 거죠? 혹시 혹시 더 나빠지는 건 아니죠?”

그분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내 귀에는 응급실 소음보다 또렷하게 박혔다. 나는 늘 그래왔듯 절차대로 설명했다. 지금 바로 검사 들어가고 있다고.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하고 있다고 말이다. 말은 정확했지만 내 목소리는 어딘가 딱딱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정확한 설명이 곧 최선이라고 믿었다. 마음을 건드릴 여유 따윈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나는 흔한 보호자 반응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딸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죄송해요. 아까 좀 급하게 말씀드려서요. 저도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말이 참 오래 머물렀다. 긴장 속에서 건너온 사과. 어떻게 보면 아주 흔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나는 잠시 일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괜찮아요. 그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러셨어요. 지금은 마음이 제일 먼저 무너질 때니까요. 저희가 곁에 있잖아요.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그녀는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냥 조용히 말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변했다. 응급실은 늘 시간과의 싸움이고 경계가 흐려지면 누구라도 지친다. 그래서 많은 순간 감정을 내려놓고 일한다. 하지만 마음을 잠깐 붙잡아주는 말 한 줄과 누군가에겐 산소처럼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괜찮습니다. 함께 하고 있어요.”

이 하나의 짧은 문장이 누군가의 밤을 버티게 해준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약을 주고 처치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의 한가운데에 놓인 사람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서툴다. 바쁜 순간엔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칠 때도 있다. 나도 인간이라 감정이 마모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날 보호자의 떨리는 사과는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내가 힘들 때와 지칠 때면 사람의 마음이 가장 먼저 닿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응급실은 치료의 공간이지만 누군가의 가장 두려운 순간이 흐르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건네는 말은 결코 작지 않다. 오늘도 나는 소음과 불빛 속에서 배운다.

환자는 병명으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으로 온다. 누군가는 절망을 들고 오고, 누군가는 희망을 붙잡고 온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아주 작은 말로 손을 뻗는다.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더라도 누군가에게 전해졌기를 바라는 그날 그 따님처럼 말이다. 고맙다고 마음속으로라도 말할 수 있기를. 응급실은 매일이 전투다. 그 속에서 내 마음은 더 부드러워지고 있다. 그것이 내가 배운 응급의학이면서도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 사는 방식이다.


수상작은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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